술이나 한 수

취한배 2004. 5. 26. 14:01

헛된 소리 헛걸음하지 말아야 할 오늘 난 주절거리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불확실한 내 자리 분명한 것은 주부라는 사실이다. 열일곱 해를 채워가도 한톨두톨  잃어버리며 북북 바가지의 옥수수 팥 보리 수수 찹쌀 검은 쌀을 비비며 하루를 열었다. 촌사람이 잡곡을 솥에 안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 단정하며 낮선 치약을 한 입 품었다. 향긋한 치약 향이 온종일 함께 하기를 염원하며

 

선물은 웃음이다.
난 선물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알량한 이유 하나만으로 청초한 난이나 꽃바구니 꽃다발 수경 재배하는 작은 화분 또는 허브, 여리고 떨림을 주는 연약한 이파리를 책으로 마음 나누기를 즐긴다. 받는 기쁨보다는 주는 기쁨을 앞서 알아버린 탓일까 두손 모아도 차지 않을 익숙치 않은 받음일 지라도 난 꽃과 책과 음악을 나눌 것이다. 가까운 이와 때로는 모르는 멀리 있는 이들과 오롯한 기쁨을 나눌 것이다.

 

참으로 낯설다.
받음을 언제나 낯설게 얼굴을 붉힌다. 아이 운동회에서 사십육키로 온전히 비끄러맨 덕으로 공책 한권 열두명 마음 합하여 한시간 풀썩이며 운동장 먼지 일으키고 받은 치약 한 통으로 지친 몸 누여 다음 날 이른 산행 지인들과 얘기꽃 피우며 오늘 문배마을 큼지막한 양푼에 손 두부 안치고 곡주와 마주앉아 당당히 목 울린 탓에 상품으로 받은 봄이 가득 베인 연둣빛 면행주 한 장이 낯설다. 느적이는 지인들 뒤로하고 서둘러 작은 발을 재촉했다. 행여 외로울까 이름 모를 새들이 찬가를 지저귄다. 새처럼 흥얼거리 것은 나였다.

 

인파에 끼었다.
문학제 시상식 아는 이를 찾아 힘차게 두손을 모아 축하를 했다. 얼마나 좋을까 팔짱을 끼고 미소를 나누며 아늑한 찾집에 조금은 지친 듯한 몸을 기대었다. 수런수런 문학부 사람들과 눈에 익은 시린 가슴들이 눈에 뜨이고 싱그런 취재하는 이의 쪽빛 스카프가 싱그럽게 눈에 들어왔다. 한 소절의 詩어 같은 안주인(마임 하는 이를 곁지기로 둔)이 집의 맛있는 차 허브 차를 내 왔다. 찻잔에 내가 잠겨 있다. 실오라기 한 잎 걸치지 않은 나, 뜨거운 물 속에 마른 뻔데기처럼 말라비틀어진 허브 잎이 내 모습 같아 마실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다음부턴 뽕잎 차를 마시리라. 너무 예쁜 허브 차는 내 수준 이상이라 떨림이다.

 

된장찌개를 끓이다
흘러내리는 앞치마를 훔치며 장독 뚜껑이 덜컹거리고 애기 배추를 데치고 멸치를 가르고 이른 저녘을 준비했다. 손에 놓지 않아도 여전히 어설픈 집안 일 흘리고 훔치고 차고 넘치고 가슴 한 구석 자리한 중용은 언제 빛을 보여 줄는지 흥미진진한 나의 자리는 빈곤한 풍요로움을 찾을까 늘 두렵기만 하다. 녹슨 분첩을 여닫으며 엷은 스카프에 앞트임이 있는 잿빛 원피스에 어울릴법한 신발을 챙겼다. 멋도 모르는 여자다. 거울보기를 돌같이 하는 나 흔치않은 거울 앞에 한바퀴 돌아보고 총총 계단을 세었다.

 

팔찌 멋지다.
물 오른 종강파티 잔을 채워주는 이가 한 마디 건넨다. 부끄러운 자세로 잔을 받는 난 오늘도 불안하게 보였구나 단숨에 구겨 넣었다. 선배 틈에 끼인 탓에 난 오늘도 기쁨조가 되어야 했다. 알콩달콩 안부를 묻고 벙긋한 웃음으로 연거푸  받은 탓에 선배가 예쁘단다. 서너순배 돌림을 마치고 그리 멀지 않은 나무 우거진 노천에서 차 냄새를 맡는 것도 기쁨이었다. 어둠을 따라 별도 달도 없는 다른 세상이다. 다들 침묵이다. 자연의 경배다. 묵언이다.

어느 이는 상가집에서도 詩를 찾아 두리번거린다고 했지
비몽사몽 중에도 詩詩詩
어느 이는 세상이 살다 싫어지면 우리 詩나 써 볼까 하여 詩를 쓴다는데
내가 이 땅에 온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의 부재를 채우려고
또는 힘겹게 버티어 낸 날을 반성하고 또 죄의 연속
또는 아이에게 기쁨을 주려고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시간이 돌아온다고 했던가
철없이 휴지통에 구겨 넣었던 아버지의 선물 얼근히 취한 품새로 늦은 귀가에도 둘째인 나를 깨워 소스라치게 놀라 나에게 급하게 먹을 갈으라던 오월  산골의 싸늘한 밤 오늘을 닮은 그 첫새벽이었다. 어슴한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먹을 갈았다. 붓을 찾느라 바스락거리는 아버지 곁에 쓰러져 잠이 든 다음날  붓과 벼루는 깨끔히 제집에 살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아버지는 싸릿대문 앞 바위에 걸터앉아 조간에 담배 연기를 피워내고

 

당첨되었다.
고만고만한 딸 넷에 일찌감치 포기한 맏이를 제치고 둘째가 찍혔다. 서른해 끼니를 채워도 늘 허기진 내가 당첨이 되었다고 동생들은 지금도 재잘거린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라던 애잔한 어머니 눈빛을 지켜만  보던 내 생에 단 한 사람 사랑했던 아버지는 무심했다. 거역할 수 없는 살아냄에 최고의 난관에 허브적이다 자식된 도리라 속을 삭이며 시작된 역마살 씌운 여행길 첫 간이역 보퉁이에서 불쑥 나온 아버지의 붓글씨 였다. 화선지를 뚫고 나올 만큼 씩씩한 詩를 지은 것이었다. 아픔이었고 눈물이었다. 단숨에 훑어 내리고 팍팍 찢어 휴지통에 던지고 뜬눈의 긴 날들을 보내야했다. 거역할 수 없는 거역이었기에

 

헛수고였다.
온전히 마음 다잡아도 온갖 세포를 동원해도 오늘도 헛수고다.
무참히 재가 되어 민들레라도 피우는데 거름이라 되길 희망하며 헤아려 보아도 아련한 죄값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 한 구절 " 한가로워라 풀을 뜯는 소 한 마리"  영원한 화두이다. 병속의 새를 꺼내려 홀로 떠돌던 지산 스님의 바짓고름이나 잡아볼까

 

선물을 받았다.
살다보면 선물도 받고 사는 것이구나
귀한 것이다. 이광수의 "나 소년편" 이란 단편이다. 아주 가끔은 기력이 쇠약해진 회초리를 쉬게 하고 주신 이에게 깊이 감사를 드리며 겉표지를 만들어 아이와 아랫목에 배를 깔고 함께 볼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흐빛한 창가 꼬리를 감춘 햇살은 오랑캐꽃 지천인 햇골 물레방아에서 또 누구와 정사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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