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나 한 수

취한배 2004. 6. 2. 03:04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1. 소설가 조정래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할 뿐이다"
“선생님, 소설을 꼭 그렇게 쓰셔야 됩니까?”
마주앉아 설렁탕을 먹던 검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천천히 눈길을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마흔이 다 차지 않은 것 같은 젊은 검사의 어조 뿐만이 아니라 얼굴도 아까 신문을 할 때와는 퍽 다르게 풀려 있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저 웃음지으며 다시 숟가락을 뜨기 시작했다. 1999년 9월 어느날 검찰청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젊은 검사가 조사 책상을 떠나 굳이 그렇게 물었던 것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소설가를 죄인 취급해가며 조사하는 것이 미안하고 마음 편치 않다는 표현이기도 했고, 또 한 가지는 왜 이런 괴로움을 미리미리 피해 서지 않느냐는 딱해 함을 담고 있기도 했다.
젊은 검사가 알고 싶어 했던것
그 검사는 ‘태백산맥’을 고발한 사람들이 제시한 500여 가지의 혐의사항들을 120여 가지로 간추려 조사하면서 내가 ‘객관적 자료’를 댈 수 있을 것인지 회의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1994년 6월에 ‘아리랑’을 쓰다 말고 경찰청의 조사를 받았던 것처럼 나는 다시 ‘한강’을 쓰는 것을 며칠 중단하고 검찰이 요구하는 객관적 자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 조사에 대응했다. 그러고 나서 그 검사와는 더 만나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 검사의 말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그 물음이 ‘당신은 왜 문학을 하는가’ 하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침묵을 했던 것은 가장 현명한 응답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탓이다.
고발당한 소설 ‘태백산맥’에 대해 어떤 편안한 휴게실이 아닌 검사실에서 그 진실을 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6.25 시절을 전혀 알 수 없다고 실토한 젊은 검사가 나한테서 알고 싶어 했던 바, ‘당신은 왜 꼭 그렇게 쓰는가’ 하는 의문의 답은 저 멀리 40여 년 전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문학에 사나이 한평생을 걸기로 작정하고 국문과 대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심각하고 절실했던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그것은 답을 얻기 어려운 물음이 아니었던가 한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문학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내 주변의 문학청년들 모두가 그 물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로 이어지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고민이었고, 그것은 또 ‘왜 문학을 하는가’ 하는 궁극적인 문제로 직통하는 시발점이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에 벌써 확고부동한 가치 한 가지를 의식 깊이 세워두고 있었다.
만인 평등의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 신뢰, 그에 따른 봉건주의 유습의 철저한 배격-이 둘이면서 하나인 가치관은, 줄기세포가 수많은 종류의 기관을 만들어가는 세포로 변형되고 분화하듯이 복합적 작가의식을 형성해 나아가는 모태가 되었다.
흑인노예 만화보고 슬픈 통증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정상일 만큼 이상한 데가 있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그 책 귀하던 시절에 만화 한 권을 빌려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던 그때 나는 사랑방의 옛날이야기에 정신을 팔고, 만화 보는 데 두 눈에 쌍불을 켜고 있었다.
그 만화는 미국 흑인 노예의 슬프고 슬픈 이야기였다. 백인들에게 쫓기며 아이를 안고 얼음장 위에서 넓은 강을 떠내려가는 흑인 여자….
나는 그 여자로 변했고 책을 덮고, 날이 가도 그 슬픈 통증은 전혀 가시지 않고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 노예 해방과 민주주의를 알게 되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링컨을 존경하는 인물로 삼게 되었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궤도가 봉건주의임을 식별하게 되었다.
그 식별에 따라 우리 사회에 일어난 여러 문제점들이 봉건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조금씩 눈떠가게 되었고, 고학년의 역사를 배워가면서 봉건주의의 비인간성은 점점 더 크게 보이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장남과 차남인 나를 불러 앉히고 족보 찾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다.
“아버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하며 나는 즉각 반발했고, 아버지는 버르장머리없는 차남에게 손찌검을 했다.
부모한테 맞을 때는 빨리 달아나는 것이 효도라는 말이 있다.
나는 효도하느라고 잽싸게 도망쳤고, 예순이 된 지금까지도 족보 찾을 줄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무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13, 4년 전에는 ‘문중을 빛낸 어른’이라며 화수회에 가입하라고 사람을 보내왔다. 나는 심부름 온 여직원에게 이 나라에 번창하고 있는 모든 화수회가 왜 없어져야 하는지를 교육시킨 다음 그 여직원을 돌려보냈다.
나는 한번 옳다고 마음에 심은 가치는 이렇듯 미련하게 지키고 가꾸려고 애써 왔다.
대학교 2학년 때였던가. ‘스파르타쿠스’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수많은 노예들이 엄청나게 큰 바위덩이들을 끌고 밀며 거대한 임금의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 한 여자는 이미 고정된 바위와 새로 붙이는 바위 사이에서 흙이며 티끌을 쓸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밀려드는 바위 틈에 옷자락이 끼어 그 여자는 바위 사이를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다가 끝내 두 바위가 밀착되는 속에서 흔적도 없이 으깨져 죽고 말았다.
옛날에 만화를 보고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다시금 바위 사이에서 으깨져 죽은 그 여자로 변해 새로운 가슴의 통증을 앓게 되었다.
이처럼 소설에서고 현실에서도 가엾고 불쌍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간격이 없이 내 가슴의 정면으로 부딪쳐 왔고, 나는 곧바로 그들이 되면서 통증을 앓아야 했다.
그 대책없는 가슴에 대해 최근에 이르러서야 ‘작가적 가슴’이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그런 가슴을 안고 대학생 상급반으로 올라가고 있는 나는 우리 사회와 역사를 통찰하려고 애쓰면서 ‘어떻게 쓸까’ 보다는 ‘무엇을 쓸까’를 고심하는 문청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 내 의식을 무장시켜 나가고 있는 것은 앞서 살다간 사람들이 남긴 경구들이었다.
작가가 돈에 작품을 파는 것은 창녀가 몸을 파는 것보다 더 더러운 짓이다.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하고, 그 실천이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톨스토이와 빅토르 위고의 그런 말들은 내 영혼을 흔든 대표적인 것들이다.
나는 그런 경구들처럼 내 의식과 영혼을 성장시키고 지키려고 애쓰는 한편으로, 우리의 험난하고 가혹한 역사에 대해서, 그런 역사의 땅에 태어났음에 대해서, 그리고 하필이면 문학을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해서 고심고심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인간다운 세상위해 기여하고파
군대를 거쳐 사회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바라보는 사회의식은 더욱 견고해져 있었고, 마음에 심은 가치들은 한결 더 많아져 생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작가가 되는 두 편의 작품인 ‘누명’이 반미 냄새가 진하고, ‘선생님 기행’이 사회 부조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나의 모습이었다.
역사의식적인 면과 사회의식적인 면, 그 두 갈레 길을 심화촵확대시키려고 노력해온 것이 내 작가의 생애가 아닌가 한다.
만인의 평등이 인간 사회의 지고한 가치라고 믿듯이 문학 또한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최고 가치로 삼고 오늘에 이르렀다.
무릎 꿇지 않고 굽히지 않는 그 길을 걷다 보니 이념 공세도 당하게 되고, 계급주의자 굴레도 쓰게 되고, 사상불온자로 고발도 당하게 되었다. 그런 고통은 분단시대를 사는 작가로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민족이 당하는 고통에 비하면 지극히 미약한 것이다.
그 검사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앞으로 필요하다면 ‘태백산맥’보다 더한 작품도 쓰기를 망설이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작가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이며, 진실한 작가는 그 어느 시대 그 어떤 정권하고든 불화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정권이나 체제는 오류를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숭고하고 보람스러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진정한 문학, 참된 문학은 역사를 변혁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 길을 따라 남은 생애를 살고자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왔다. 당신은 사상적으로 성분적으로 무슨 주의자냐고.
굳이 그렇게 분류하고 싶다면, 정의와 진실을 실현시키고자 하니까 진보주의자고, 민족적 자존을 지키고자 하니까 민족주의자라고, 그 어떤 간섭이나 억압 없이 예술 창작을 하고자 하니까 자유주의자이다.
그러나 이런 분류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문학을 섬기며 남은 생애를 흠없이 살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서러운 역사의 땅에서 진실을 찾아 헤매며 글을 쓰다가 갈 예술가일 뿐이다.
입력시간 2002/03/20 16:41

2. 소설가 김주영


자유는 나의 숙명…고통은 나의 벗

막막하다. 그리고 모르겠다. 혼자서 때로는 여럿이 모여서 소설 쓰기에 일생을 던진 것에 수없이 물어서 괴로웠던 화두였다.
그런데도 아직 단호하고 명백한 대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등산하는 사람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었을 때,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는 대답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소설 쓰기의 경우, 그런 차용은 미진하거나 과녁을 빗나간 대답일 듯하다.
내게 왜 소설을 쓰느냐고 힐책의 어조로 윽박지르는 듯한 질문을 맨 먼저 던진 사람은 어머니였다.
물론 딱 부러지는 대답을 못했었는데, 그땐 천착도 경륜도 없는 설익은 나이였기 때문이라는 자위가 있었다. 그런데 환갑을 서너 해까지 넘긴 이 나이까지 도달했음에도 내가 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인지 아직 모른다.
이를테면 소설 쓰기를 치열하고 끈질기게 계속한다면, 세속적으로 근근히 살아 남을 수는 있겠지만, 이빨을 앙 물어도 돈 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매우 확실해졌다.
혹은 가문의 법통이나 줏대를 세워나가는데 명분을 보태주거나, 사회적으로 또는 가족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도 확실해졌다.
명성을 얻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 역시 한 순간 화려했다가 소멸하는 불꽃놀이와 같아 영속성이나 보존성이 뒤떨어진다.
남들처럼 퍼올려도 퍼올려도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슴속에 사무치는 회한이나 비장함이 간직된 것도 아니다.
패기 넘치는 지성이나 심오한 직관은 아예 없기에 학문적인 탐구라면 어불성설이고, 사랑의 추구 혹은 예술행위라면 너무나 미흡한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뒤에서 밀어붙이는 도도한 물결에 곧잘 딴죽 걸리거나 빈축 사고, 앞 물결에 따귀 맞기 일쑤여서 작업에 대한 성취감도 잠시 잠깐이다.
고고하게 살기는 너무나 어렵고, 세속적인 성취감을 획득하기에도 더욱 어렵다.
그래서 생각은 언제나 구름 위에 있어도 몸뚱이는 개천 바닥에 떨어져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처럼 이상과 현실이 빚는 갈등의 수렁에 양다리가 빠져 있어 몸 둘 바를 모른다.
게다가 부지불식간에 지식인의 범주에 끼어 들어 무슨 화끈한 일이 닥치면, 결과에 대한 동물적인 확신이나 신념을 가지고 과단성 있게 밀고 나가려는 투지와 기백은 마모되고 말았는데, 의협심 한가지는 남달리 강해 자신이 괴롭다.
사회의 병리 현상에 예민하게 대응하고 곧잘 분개하지만, 그렇다고 고결하고 품위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항상 뭔가 애매하다.
옥탑방에 들어앉아 제딴엔 고독과 상실, 운명과 경이로움에 대해 전광석화와 같은 언어로 줄곧 뭔가를 쓰고 있는데, 그 결과물이 우호적인 손길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인지 자신도 측정할 수 없다.
자신에게는 휴식의 수단인 담배와 술, 그 유독성 물질의 간단없는 섭취로 몸뚱이는 낙엽처럼 지쳐 있고 병듦에 대한 공포감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감수성 혹은 상상력의 그릇이 고갈될까 시를 읽고, 영화 보고, 그림 보고, 여행하고, 심지어 한밤중의 패션 프로까지 시청하는 노심초사를 겪고 있지만, 이렇다 하게 눈에 띄는 성과는 없다.
과연 허우대 건장하게 갖춘 한 남자가 일생을 무자비하게 투자할 만큼의 가치와 명분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줄곧 의구심을 가져왔다.
한때, 문학 혹은 소설 쓰기와의 결별을 결심했던 적이 있었다. 결심을 굳힌 다음, 변방이라 할지라도 낯선 세상으로 무리 없이 편입되기를 바라며 그들의 삶의 바탕과 방식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세심하게 관찰하고 분석해보려 하였다.
급기야 돈 벌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려는 사람도 있었고, 직업의 전환을 알선하려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화려함을 예고하는 그 가능성들은 일탈에 대한 제어력과 감시기능이 완벽하게 갖춰지고 장착된 족쇄나 계측기처럼 규범과 속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그것들을 삼엄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겐 도무지 익숙하지 못했고, 선뜻 동의할 수 있는 것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해체의 불안감이 폭발적으로 감지되는 지뢰밭일 뿐이었다. 그래서 1년 남짓한 동안의 배회 끝에 나는 열적은 표정으로 풀기 어려운 퍼즐게임에 몰두해 있는 문학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을 바꾸고 말았다.
문학을 하기 위해 겪게 되는 광범위한 고통의 최면도 익숙해지면, 피둥피둥하고 온전한 살점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한한 자유가 존재하는 곳에 고통이 없으면 그 자유가 빛나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가슴에 품고 있는 간절한 소망이 있고, 그래서 어딘가 소중한 사람들, 술과 담배에 절어 있지만 심장 한 가지는 벽돌보다 단단해서 깨어질 줄 모르며, 깨끗한 영혼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애를 끓이는 사람들 속에 내가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소망과 위로의 예감이 종교적인 흡인력으로 나를 끌어당긴 것이 분명했다.
창작생활에서 무한대로 열려있는 자유에 나는 마취되어 있다. 중독은 의지로도 극복하기 어렵다는 판명이 있다.
궁핍 혹은 상대적인 빈곤으로부터 속시원하게 해방되고 말았음에 대하여, 세금 낼 것을 거짓 신고하지 않았음에 대하여, 비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누구든 비판할 수 있는 배포에 대하여, 분수 이외의 것을 넘보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현란한 세상 위에 놓여진 허위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슴 에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도 무한한 명분과 기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음에 대하여, 사랑할 수 있음에 대하여,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가슴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음에 대하여, 남이 웃고 있을 때 울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남의 글에서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을 발견하고 무릎을 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낯선 나라 낯선 땅 낯선 마을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촌부의 눈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음에 대하여 나는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때문에 마루바닥을 훔치다 만 걸레처럼 이것을 호락호락하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절대적이다.
문학 행위를 깔아둔 지 오래된 카펫을 들춰보는 일과 비교해 봄직하다.
우리들 일상의 삶들이 배설해서 밑바닥에 가라앉은 고통과 갈등과 비통함의 먼지들 혹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무심코 밟고 다니는 사소한 그것들을 들춰내어 그것의 명분과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비통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이문구씨의 ‘관촌수필’이나 신경림씨와 김기택씨의 시들은 그래서 우리들을 울게 만든다.
두 눈 부릅뜨고 이빨을 갈아 물어도 온전하게 살아 남을 것 같지 않은 세상에 사람을 울게 만들 수 있는 기량과 능력을 소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 받을 문학적 역량이며 수확인가.
그런 분들을 비교적 근접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도 흡족하다.
우리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산골 시골 마을에는 곰배팔이, 절뚝발이, 육손이, 언청이와 같은 선천성 질환으로 불구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둘씩은 꼭 끼어 살았다.
그들은 필경 모자라는 반편 취급을 받거나, 아이들의 조롱감이 되곤 하였다.
그런데 마을에 위급하거나 애꿎은 사건이 발생하여 사람을 불러와야 할 일이나 이웃 마을에 그 사실을 통기해야 할 때, 혹은 궂은일을 도맡아줄 사람이 필요할 때 마을의 공동체는 십중팔구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또한 평소에도 내 잘났다고 떠벌린 적이 없었던 그 불구자를 지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칼날 같은 바람이 갈개치는 혹한 속이거나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이거나 상관하지 않고 군소리 한 마디 없이 궂은 일을 치러내곤 하였다.
내 소설이 세상 속으로 나가서 소금이나 향유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바람이다.
그러나 어쩌면, 탄탄한 문장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미끄러지듯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고, 어린 시절 마을에서 살았던 곰배팔이나 절뚝발이가 그랬던 것처럼 평소에는 반편의 취급을 당하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궂은일을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치러 나가려는 의지를 가진 소설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런 일인가.

입력시간 2002/03/27 16:35

3. 소설가 강은교

내가 한바가지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1. 마중물: 어둠속에 앉아 있는 것들

한밤중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 모든 것들은 입술을 굳게 닫고 앉아 있다. 그것들은 내가 입술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눈을 뜨자마자 나의 각막에 제일 먼저 와 닿는 창문, 어둠이 잔뜩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창문, 흰 격자 무늬가 기하학적으로 그려져 있는 창문의 입술도 딱딱하게 굳어 있다. 멈칫멈칫 일어나 마루로 걸어 나온다. 거기에도 어둠은 빼곡하다. 딱딱하다. 마루의 창 밖도 그렇고, 그 밖의 밖, 수평선도 그렇다.
창 앞으로 다가선다. 딱딱한 어둠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연신 깜박거린다. 마치 서 있는 나에게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도 같이. 등대다. 단속적이나 끝없는 그 눈초리의 흔들림, 입술이 딱딱한 자의 염원.
나는 어둠 속의 모든 사물들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천정: 언제나 무슨 일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기대에 차서 바라보고 있는 그것. 영산홍: 네 속에 있는 꽃을 내보여라, 네 속에 있는 꽃을…. 가로등: 창 밖 어둠 속, 바다 앞 주차장에 서 있는 그것-그림자를 골똘히 내려다 보며 서있는 그것. 집안으로 눈을 돌리니 의자들도 그렇고, 흰 벽도 그렇고…주전자도 그렇고….나는 주전자에 물을 담는다. 수도꼭지에서 콸콸 거리며 흘러나오는 그것, 물 속에도 꽉 다문 입술이 있다. 그것은 멈칫거리며 쏟아진다.
어떻게 하면 저것들을 말하게 할까. 저것들의 말의 욕구로 어둠의 모든 입술들을 움직거리게 할까. 마중물이 필요하다. 마중물은 펌프질할 때 맨 처음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말한다. 내가 던지고 싶은 물 한 바가지. 그 한 바가지 물에 의해 보다 깊이 숨어있던 지하의 물은 쏟아져 나온다.
말하자면 그 무엇으로도 잘 적셔지지 않던 물의 가슴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물의 헤집어져 있던 가슴들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일어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물의 가슴 속은 아직 하얗구나. 아직 물의 입술은 딱딱하고 딱딱하구나.
나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올려놓는다. 가스불을 켠다. 점화하는 순간, 파아란 불꽃이 주전자의 밑둥을 향하여 올라온다. 맹렬한 기세로 올라온다. 내가 꼭지를 틀자마자 저렇게 맹렬히 불붙다니…기다리고 있었구나, 무엇인가 점화해주기를. 나는 커피잔을 들고, 종에게로 간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종을 한 번 살짝 두드려 준다.
손가락으로 에밀레종의 쇠살을 살짝 두드려 보다가 두 개의 에밀레종의 두꺼운 쇠살을 서로 부딪혀 보게 하고, 자루가 긴 인도의, 나무로 된 종은 머리 위로 흔들어본다. 나의 경자(磬子)이니까. 경자는 원래 스님들이 책상 위에 놓고, 대중(大衆)을 깨우기 위해 한 번, 불도(佛道)를 깨우치기 위해 또 한 번 치던 종이었다.
나도 스님처럼 ‘세상을 깨우고, 나도 깨우소서_’중얼거린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종들의 소리는 깜깜한 어둠 한가운데로 걸어나간다. 어둠의 입술을 만지면서. 어둠의 어깨를 쓰다듬어 보면서. 어둠의 허리에 팔을 걸쳐 보면서.
그러나 어둠의 몸에 팔꿈치라도 부딪을까 조심하면서. 엉거주춤 현관에 서 있는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띈다. 참 많이도 걸어온 그것. 어느 고개인가의 흙을 밟으며, 어느 길목인가의 신호등을 건너며…왔을 그것. 현관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목이 긴 겨울 구두. 갑자기 한 가지 질문이 내 입을 걸어 나온다.
‘개인은 의미가 있는가. 무수한 개인은 결국 무수한 무의미인가. 생명 시스템의 한 가지 위에 있는’. 나는 절하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십자가라는 기호’ 아래서 온몸의 얼굴화를 꾀하고 있는 이가 예수라고 하고 있지만, 나는 나의 온몸이야말로 ‘문학의 얼굴화’가 되기를 순간 꿈꾸면서 절한다.
온몸이 종교화한 크리스트의 얼굴처럼 문학화한 나의 팔, 문학화한 나의 다리, 나의 손…. 어둠 속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바다에게도 절한다. 모래 언덕의 아무 곳에나 기도의 카펫을 까는 아랍인들처럼 나의 자그만 카펫을 편다. 이리저리 언어가 얽힌 나의 실크 카펫, 나의 마중물 언어가 앉아 있는 실크 카펫.
2. 마중물: 모래밭
날이 밝기 시작한다. 날이 밝을 때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푸른 색을 이 세상은 잠시 띤다. 이러한 푸른 색은 저녁 무렵 또 한 번 있으리라. 모래밭으로 나간다. 물가에 앉아 있는 새를 바라본다.
가슴이 흰 물새의 추억: 지난 어느 여름날 아침, 모래밭 둔덕에서 물새를 보고 있었을 때 유독 무리에서 떨어져 고독하게 앉아 있던 물새의 부리에서 하얀 것이 휘익 하고 떨어졌다. 다른 새 한 마리가 그것을 얼른 받아 물었다.
또 한 마리의 물새가 끼어 들었다. 물새들은 경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푸르르 한 마리가 날아 올라 버렸다. 싸움은 끝났다. 그 소리없는 아침의 싸움. 그 하얀 것은 물고기였다. 그 싸움 속의 새와 물고기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물고기는 새의 부리에 닿는 순간 죽어 갔으리라. 죽음은 그 물고기를 아무 것도 아닌 것[‘나의 최근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생명-기계, 생명-시스템의…]으로 만들고 있었으리라. 그 물고기가 물풀 사이를 유유히 달려 다니고 있었으며…장자의 ‘곤(鯤)’일지도 모르며…하는 사실들은 결코 말할 필요 없이.
그 물고기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3. 마중물: 그리로 가며 한낮에 나는 한 언덕으로 간다. 벚꽃이 하얗게 날리고 있다. 벚꽃 그림자가 땅을 꽈악 껴안고 있구나. 이미지 하나를 떠올린다. ‘벚꽃 그림자 땅과 만나 인사하다. 꼭 껴안는다.
시작.’ 장자의 ‘그림자 우화’를 생각한다. 읽을수록 맛이 나는 구절. ‘한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자취를 싫어하여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달아났는데 발걸음이 잦을수록 발자취가 많아지며 달아나는 것이 빨라질수록 몸에서 그림자가 떨어지지 않으니, 자기걸음이 아직 더딘 때문이라 생각하고 쉬지 않고 질주하여, 힘이 다해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멈추어 있으면 발자취가 사라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人 有畏影 惡迹 而去走者 擧足愈數 而迹愈多 走愈疾 而影 不離身自以爲尙遲 疾走不休絶力而死 不知處陰而休影 處靜以息迹 愚亦甚矣! ‘잡편’ 중에서)
4. 마중물: 경련 경련이 일어난다.
1972년 뇌수술 이후 가끔씩 일어나는 것, 춥거나, 배고프거나, 빛이 너무 현란하거나 스트레스가 너무 과도하거나 하면 일어나는 것. 내가 살과 피의 스파크라고 이름붙인 것. 지금 이 언덕에서 나는 좀 추운가. 배가 고픈가. 들뢰즈의 경련에 대한 해석이 떠오른다. 얼굴에 일어나는 경련에 대한 것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얼굴의 주권적인 조직화에서 벗어나려 하는 얼굴성의 특징과 이 특징 위에서 갇히고 그것을 다시 붙잡고 그것의 도주선을 봉쇄하고 그것을 다시 조직화하는 얼굴 그 자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싸움이다….’ 아무튼 이 싸움 너무 길다.
나는 ‘온 몸의 문학화’를 너무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하긴 이번에 나는 나의 뇌사진을 다시 찍었다. 아름다웠다. 형광 램프에 비쳐진 나의 뇌사진은 마치 나비들이 엎드려 있는 것 같았다. 내 머리 속에 있는, 날지 못하는 수많은 나비들….
5. 마중물: 필그림 케이(Pilgrimk)의 디스켓에 넣어놓은.
꺼내주어라. 그 나비들을. 살려내어라. 그 물고기를.
그 ‘구두’에 대하여, 그 ‘천정’에 대하여. 그 ‘꽃그림자’에 대하여…써라, 끊임없이 써라. 그러니까 나는 아직 한 바가지의 물을 뜨고 있는 셈이다. 나는 잠 속에서도 이 펌프질을 계속하리라. 그리하여 새벽엔 다시, 어둠 속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것들을 보리라, 들여다 보리라. 무의미의 의미[메를로 퐁티]가 되며.

pilgrimk : 강은교 시인의 아이디

입력시간 2002/04/03 18:13

4. 시인 고은


한하운 읽은 뒤 영혼의 섬광…詩는 폐허의 悲歌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별들을 본다. 그제서야 별들이 먼저 지상의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어떤 비관론자와도 무관하다. 이 세상에는 다른 세상을 위한 종말이 있다. 이 세상은 수많은 흥망성쇠의 시간과 장소만이 아니라 마침내 흥망성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 해서 종말이 언제냐고 섣불리 따지려 들지 말라. 다만 그런 세상에서 엄연히 살아가는 것이 너와 나이다. 나의 문학은 이런 세상의 일부분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 왜 시를 쓰는가?
비 온 뒤의 앞산처럼 확실한 이런 질문으로 나는 문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밀물이었다. 그저 시인이 되었을 뿐이다. 썰물이었다.
시인 노릇 45년이 어느덧 되어가는 오늘에도 이 노릇에 대한 어떤 가설도 마련되지 않았다. 일의(一義)란 죽어라고 싫다. 굳이 말하자면 불가피성 말고는 내 삶의 궁핍한 역정 가운데서 문학의 이유를 찾아낼 다른 여지가 없는지 모른다.
풍경이 시작되었다. 1940년대 후반 중학생이 된 나는 4㎞ 거리의 학교와 집 사이 황톳길을 걸어 다녔다. 비오는 날은 우산 대신 도롱이를 걸쳤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약 4년 동안 이런 길을 오고 갔으므로 길 가녘 우거진 여름날의 각시풀과 꿀먹은 벙어리 같은 돌멩이도 한 핏줄인 양 정이 사뭇 들었다.

저녁의 향수가 감수성 근원
방과 후 거의 혼자 돌아오는 시간이 누구에게도 발설하기 싫은 행복이었다. 호젓할 때면 나는 내 동무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서 복수(復數)였다.
길은 어쩌다 만나는 장꾼이나 소달구지 말고는 비어 있었다. 미술반은 자주 늦게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녁 무렵이기 십상이었다.
혼자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학교와 집의 의무로부터 지극히 자유로웠다. 그런 시간으로 너무 일찍부터 낮 동안의 끝인 저녁에 익숙해졌다.
지나는 길의 마을마다 밥 짓는 저녁 냉갈이 저기압의 땅 위를 가득히 깔려 있을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한 향수는 한 소년에게 감수성의 근원이 되어 주었다.
새벽의 수탉 우는 소리, 아침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보석들과 동정(童貞) 같은 햇빛 소나기, 그리고 대낮의 갑작스러운 적막…들도 찬란한 환경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나의 저녁 무렵만 하겠는가.
하루 내내 들에서 일한 다음 해가 진 뒤의 연장을 물에 씻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일과에 어느덧 나도 속해 있었다. 저녁은 그렇게 숭고하고 슬펐다.
‘돌아오다’, ‘돌아가다’라는 말이 나에게 달라붙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자 ‘귀(歸)’자가 어쩌다 친정 나들이하는 여자의 기쁨을 담고 있다면 인간의 본성 안에 그런 귀향의 심상이 바닥져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내가 쓴 시 중에 유난히 저녁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시인들에게도 저녁은 하나의 주조(主調)였다.
그런 저녁 무렵 나는 꺼므꺼므한 어슬녘을 걷고 있었다. 집을 1㎞쯤 남겨놓은 길 한복판에서 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 우연이야말로 필연이었다.
그 물체는 마치 오랜 발광체처럼 팍 저물어버린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책이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새 책이었다.
시집이었다! 한하운(韓何雲) 시집이었다!
온몸이 전류에 휘감겨졌다. 그 시집 속의 글자 하나하나를 어둠 속에서 뿌리째 뽑아내어 읽어갔다. 돌부리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아마도 누군가가 사 가지고 가다가 그만 길에 잘못 떨어뜨린 것이리라. 그 시집의 임자를 찾아 나설 생각 따위가 전혀 없었다. 시집은 오직 나를 위해서만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가도 가도 황톳길….
이 구절은 곧장 내 심장 속의 주술이 되어 주었다. 밤새 뜬눈이었다. 조영암과 최영해라는 사람의 발문도 몇 번이나 읽었다. 먼동이 텄다.
두 가지를 결심했다.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려야겠다는 것과 나도 시인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길을 걸어가며 떨어져나간 썩은 발가락을 노래하고 이 세상의 길을 노래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내 심장속 주술이 된 구절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 이후 나는 다른 학생들과 달랐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이고 나는 남몰래 철이 들어버린 ‘어른’이 되었다. 점점 미술반이 싫어졌다. 교내 미술 전시회에서 받은 일등상의 기쁨은 시 앞에서 무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채화에서 유화로 옮겨가야 했다. 그 뿐 아니라 미대를 갓 나온 교사 안태훈은 나에게 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인물화까지도 강요했다. 아니 자신의 시내 작업실로 나를 데려다가 모델 그림까지 그리게 할 것이라고 다그쳤다.
이렇듯이 학교에서는 장래의 화가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일의 시인이었다. 시인이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그런데 바로 1년 전만 해도 나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외삼촌의 서가에서 반 고흐 전기를 꺼내 보았을 때 나는 ‘오직 고흐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이리라’라고 책상머리에 써 붙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다음에 시인에의 열망이 다른 것이 되고 싶은 나머지 한때의 열병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가정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시 혹은 문학은 반드시 그 시대의 어떤 상흔에서 그 의미를 이끌어낸다. 시인은 그러므로 상처받은 혼신(魂身)이다. 나에게 시는 전쟁 이전의 꿈과 전쟁 이후의 절실성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북위 38도선이 무너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6월 27일 학교는 무기 휴교조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걸핏하면 발생하던 단정 반대의 좌익 동맹휴학도 그 뒤를 이은 이승만 지지의 우익 결의대회도 사라져 버린 학교 운동장은 바람이 불면 먼지 구름이 몰려가거나 하루 내내 뻐꾸기 소리만 쌓여 있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호젓한 저녁길이 없었다.
여름 3개월 동안 내 또래의 인민군 병사와 인민위원회 그리고 민청, 여맹 따위의 붉은 완장에 익숙해졌다. 담배를 배웠다. 엽연초를 잘게 썰어 그것을 종이에 말아 피웠다.

좌익·우익 핏빛 학살

전선은 낙동강 중류까지 남하했고 진주 남강도 떨어져 나갔다. 9월의 인천 상륙과 함께 거듭된 후퇴가 역전되어 압록강 강물을 떠오기까지 했다. 다시 1촵4 후퇴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 고향은 우익의 좌익 학살, 좌익의 우익 학살, 다시 우익의 좌익 학살의 보복으로 살벌한 죽음의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인명 희생자 300만 중 1만분의1을 내 고향이 담당한 것이다.
몸에서 썩은 학살 시체 냄새가 15일 이상 없어지지 않은 채 살아 남았다. 나는 여름 나무 그늘에서 읽었던 신석정 시집 ‘촛불’을 아주 덮어버렸다. 시는 그 야만의 계절에 대해서 무능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가 가능한가”라고 외친 아도르노의 말은 한반도에도 적용되고 남았다.
한국시 50년대 후반 또는 60년대 전반의 모더니즘은 그것이 서구 모더니즘의 뒤늦은 모방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상황을 통한 전통 단절과도 깊이 관련된다. 요컨대 전쟁은 시를 묻어버렸고 역설적으로 다시 시를 불러들였다.
나는 널브러진 시체더미 앞에서 인간의 정체를 다 알아버린 듯한 허무에 사로잡혔으며 고향을 떠난 뒤 내내 떠돌았던 모든 산야와 도시는 폐허에 다름 아니었다.
내 문학은 그런 폐허를 떠도는 자의 비가(悲歌)이기를 자처했다. 그래서 시의 본적지는 폐허이고 시의 현주소는 폐허의 기억을 가진 미완의 역사 현장인 것이다.
세 살 무렵의 아이는 “왜?”로부터 세상을 시작한다. “왜 아빠의 젖은 젖이 안 나와?” “왜 엄마 구두하고 아빠 구두하고 달라?”
이런 의문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짓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학에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세 살 무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의 오늘에 있어야 할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힘은 해답에 있지 않고 치열한 질문에 있다.

입력시간 2002/04/10 19:23
  
 말을 줄5. 소설가 신경숙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향해
"작가는 보지말아야 할 것을 본 운명"

자정이 지난 지 세 시간이 되었다. 2시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집 주위 어딘가에 양철통이 버려져 있는 모양이다. 그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제법이다.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이따금 손톱을 들여다보고 이마를 문지르고 녹차 잔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반복하고 있다. 원고는 아침까지 보내놓기로 했는데 빗소리나 듣고 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가장 할 말이 많아야 하는 대목인데 나는 이 질문에 늘 전전긍긍이다. 최선을 다해 이렇게 말해보아도 아닌 것 같고 저렇게 말해도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등단한지 17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진행중이다.
일찍부터 작가가 아닌 나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음에도 그러하다. 어쩌면 해답은 거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정확한 것, 시비가 가려지지 않는 것,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것, 이를테면 말해질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이 이 세계에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노트에 문장을 지어보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의 부유
어머니는 이따금 이상한 이야기를 하였다.
젊은 시절 어느 한 여름날 어머니 혼자서 산밭을 매러 갔단다. 그런데 처음 보는 늙은이가 밭을 매고 있더란다. 누구냐고 물어도 말도 안하고 부지런히 밭을 매더란다. 어머니는 고마워서 싸 가지고 간 새참도 같이 먹었단다. 그 늙은이는 어머니 옆에서 종일 함께 밭을 매고는 날이 저물자 가야겠다고 일어서더니 금세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단다.
혼자 터벅터벅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역시 다 늙은 고모에게 그 늙은이 이야길 했더니 고모가 그 늙은이가 이러저러하더냐 물어왔는데 비슷하더란다. 이것 저것 묻던 고모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 늙은이는 다름 아닌 그 밭의 전전 주인으로 한 여름날 밭을 매다가 일사병으로 죽은 이라고 하더란다.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셨다. 불쌍도 하지. 그래 죽어서도 밭을 매고 있다니. 그깟 놈의 풀이 좀 자라면 어쩐다고.
어머니는 또 이런 이야기도 하였다.
너희 외갓집을 지을 때 너희 외할아버지가 꿈을 꿨는디 글쎄 황소 한 마리가 기지개를 켜며 막 일어날라고 허더란다. 생각해봐라. 다른 짐승도 아니고 힘센 황소가 막 일어날라고 하는 참이었으니 얼매나 기운이 뻗치는 때였겄냐. 그 집 지은 후로 너희 외갓집이 막 번창했지 않으냐. 다 그 황소 덕분이었재.
그 집서 그냥 눌러 살았어야 했는데 외삼촌이 글쎄 집을 팔고 읍내로 나가지 않었냐. 집 판다고 들썩거릴 때 외갓집 뒤란 대숲에서 구렁이가 기어 나와 혼비백산했었다. 그거이 다 징조였다.
집 구렁이는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것인디 집 떠나지 말라고 말해주러 나왔던 갑더라. 근디 끝내 집을 떠나서는 니 외삼촌이 한때 정신까지 이상해지지 않았더냐.

◈ 내밀한 욕망 노트에 기록
유년시절을 보낸 마을은 아래로는 광주나 목포 여수 위로는 서울이 종착역인 철길이 놓여 있었다. 그 철길을 사이에 두고 이편 저편에 우리 집 논이 있었다. 나는 기차가 지나가면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멈추고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끔 기차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향해 손을 마주 흔들어주기도 했다. 무의식적인 행위였지만 나는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선망했던 것 같다. 내가 그 기차를 타고 그 마을을 떠나게 되기 전까지 그 철길은 나로 하여금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게 했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추수가 한창인 논으로 가던 내 뒤를 따라오다가 기차에 치이기도 했고 술을 먹고 철길을 베고 잠이 든 사람의 머리통이 날아가기도 했으며 살아가는 것에 더 이상 의욕이 없던 일가족이 그 길에서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사람이나 짐승이 죽어나갈 적마다 기차는 500m쯤 지나서 멈췄다.
기차의 속도는 제어할 수 없이 빨라 기관사가 물체를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 발견을 했는데도 이미 늦었다는 것. 그것은 가장 늦었다고 생각되는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중학생 때였다.
나는 그때 우정이라는 것을 오해했다. 나만의 비밀, 이를테면 나만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너와 함께 나누는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머루같이 검은 눈동자를 지닌 여자애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그 여자애와 관계를 맺고 싶은 나의 간절한 욕구였다. 그때 나의 최고의 비밀은 키가 크고 이마가 반듯했던 사회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아마도 진땀을 흘리거나 혹은 더듬거리며 그 여자애에게 내 마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새로운 관계에 대한 기대로 인해 뺨이 발그레해져 잠을 못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학교에 가보니 그 여자애에게만 은밀히 토로한 나의 비밀을 다른 아이들이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이런 일들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적기 시작했던 것이 점점이고 노트에 적는 일이 중요해졌다. 현실에서 부르는 이름 지명 장소들은 내가 다 새로 지어 넣었다. 암호처럼 나만 알아 볼 수 있는 희열이 있었다.
나의 내밀한 욕망들을 기록해 가는 사이에 노트 안에서는 희한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들을 표현해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틈 속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멀리 있는 것, 여기가 아닌 저기가 서로 엮어지고 짜여지며 또 하나의 세계를 일구었다.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노트 안에서는 상상력이 작용되어 가능해지기 시작했고, 타자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오해만 일으키는 감정들이 노트 안에서는 미화작용을 일으키며 풍성한 밭을 일구어 나갔으며, 형제 많은 속에서 자라는 동안 무수히 침범 당하는 나 개인의 일상이 노트 안에서는 무한대로 자유로웠다.
나는 그 자유 때문에 점점 노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나쳐 무엇이든 다 문장으로 바꿔보려는 게 습관이 되어갔다. 나중에는 문장을 쓰는 것 자체를 즐겨 시나 소설을 노트에 빼곡하게 옮겨 적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떠나온 도시에서 만난 은사는 내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나는 무단 결석이 길어져 제적 대상이었다. 도시는 마음을 붙일 만한 게 없었다. 어쩌다 마음을 붙이고 살아보려고 하면 어긋났다.
모두들 화가 난 사람처럼 각자들 다른 곳을 향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뭐라고 뭐라고 쓰다 보니 노트 반 권이 채워졌다. 무슨 문장을 썼는지 지금은 다 잊었다.
아마도 방문을 열면 넓은 마당이 펼쳐졌던 태생지에서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방문을 열면 한 사람이 드나들기도 좁은 부엌과 마주쳤던 비애와 갑자기 도시 빈민자가 되어버린 불합리한 삶을 뒤에 감추고 암호 같은 이야기들을 나열해 놓았을 것이다.
그 문장들은 쓴 나조차도 해독할 수 없는 말더듬이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는 반성문을 읽어보고 내게 소설가가 되어보라 했다. 꿈이 필요했던 내게 그 말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 같았다.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소설가가 되어 가는 중이다. 현실을 따라갈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나는 한 순간도 머물지 않는 유동적인 이 삶을 표현하는 것에 의지해 견뎌왔다. 이따금 나는 내 소설이 내 삶이 저질러놓은 오류에 대한 반성문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 삶,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움직이는 이 삶 속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인간관계, 나도 모르는 사이 문을 닫아버렸던 문 바깥의 세계, 나로 인해 삶이 흔들렸을지도 모르는 타자에 대한 반성문일지도.

◈ 머물지 않는 삶의 상실… 소멸
작가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버린 운명의 소유자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밤낮 없이 형틀 같은 의자에 앉아 있기를 자청하겠는지. 내가 보아버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로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영원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작가생활이 끝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는 긍극적으로 소외자의 편이다. 해결되지 않는 것에 시선을 두고 있으며, 묶여있는 것이라면 풀어놓고 보려는 자유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 속성은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가장 큰 슬픔을 남기며 상실되어가는 꼴을 지켜보는 힘을 주었다.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한때의 진실이 남기고 간 발자국을, 태어남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소멸을,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해체되어버리는 것이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들을 어떻게 간직하고 견디어내고 지탱할 수 있었겠는지.

입력시간 2002/04/18 10:28

6. 소설가 윤흥길

"소설은 내 존재 증명을 위한 정신적 방랑"

오래 전에 똑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신은 왜 문학을 하는가?
1980년대 초에 프랑스의 ‘리베라시옹’ 지가 창간 기념 특집으로 부록을 꾸미면서 각국의 400여 문인들에게 던진 앙케이트의 내용이다.
나중에 지상에 발표된 앙케이트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
방귀깨나 끼고 산다는, 존경받을 만한, 당대의 저명 문인들이 문학을 하는 이유가 예상했던 만큼 그렇게 고상하거나 깊이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유명해지고 싶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등등 상당수 문인들이 아주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문학을 한다고 답하고 있었다.
겨우 그 정도 알량한 이유로 문학에 임하면서 그것도 무슨 자랑이라고 떳떳이 밝히는가 싶어 처음에는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쪽이 외려 더 솔직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실은 나 역시 형이상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아주 알량한 이유로 처음 문학을 시작했다.
내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살다 가는 흔적을 어떤 식으로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당신은 왜 문학을 하는가. 창작 활동을 하면서 자주 부닥뜨리는 질문 중 하나다.
그때마다 나는 제법 그럴싸한 명분을 달아 내가 왜 문학을 하는지를 밝히곤 한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것은 질문에 대비하여 뒤늦게 정리해서 마련한 답변일 뿐, 실은 맨 처음의 그 생각, 내 존재 증명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찾고 싶다는 그 욕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우선, 나는 고백하기 위해서 문학을 한다.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 고백성사하는 종교적 고백만이 고백은 아니다.
문학적 고백의 형태는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해서 죄와 허물뿐만 아니라 열등감, 상처와 장애, 가난, 슬픔과 외로움, 수치심, 통증 등등에 대한 표현 모두를 포괄한다.
나는 낯선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하거나 학년 초에 새내기 학생들을 맞는 첫 시간이면 내 어눌한 말주변과 신체적 결함 때문에 혹시라도 실수하고 망신당할까봐 무척 긴장하고 위축된다.
그래서 내 구강 안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사실은 내가 전면의치를 끼고 있다는 점을 대뜸 고백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곤 한다.
문학의 제단 위에 아까운 이빨을 몽땅 제물로 바친 나의 말실수를 비웃는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청중들 사이에 웃음이 터진다.
비로소 나는 내 신체적 결함에서 비롯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진다.
빌어먹을 틀니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을 받아 나는 그 틀니를 다스리는 주인이 된다.
약점을 일찌감치 솔직하게 고백해버린 나를 사람들은 우호적으로 너그럽게 대한다.
전투 중에 총상을 입은 병사가 목청껏 군가를 부른다. 낙반 사고로 막장 안에 갇힌 광부가 신심을 다해 찬송가를 부른다.
고초 당초보다 매운 된시집살이에 시달리는 며느리가 밭일을 하면서 시어미의 흉을 담아 농요나 부요(婦謠)를 읊조린다.
품꾼들이 깊은 우물을 파면서 흥겨운 노랫가락에 동작을 맞추어 힘든 노동을 견딘다. 이 모두가 고백인 셈이다.
노래 형식에 의탁해서 자신의 아프고 두렵고 서럽고 고단한 처지를 밖으로 표출함으로써 억압기제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고백의 일종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지극한 상실감과 절망은 곧잘 통곡으로 표현된다.
울음의 형식을 빌려 감정을 고백함으로써 슬픔의 근저에서 멀리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차마 못 당할 억울한 꼴을 당한 사람이 남몰래 일기를 쓴다.
원한과 분노를 글로 고백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보복보다는 자기 자신을 비참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안간힘이다.
문학이란 원원이 자기 구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작가가 작품을 빙자해서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호소할 때 일차적으로 작가 자신이 해방되고 구원받는다.
만일 그 고백과 호소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독자들이 생긴다면 작가 개인의 구원은 이차적으로 다수의 타인의 구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데뷔작이자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은 이를테면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 고백문과도 같은 소설이다.
그만큼 사소설적인 요소가 대폭 수용된 작품이다.
군복무 중 갑작스레 부친상을 당한 사병이 곤궁한 형편에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 가족들을 도울 길이 없어 병영 안에서 탈영을 꿈꾸는 암담한 이야기다. 그 사병은 바로 나 자신이나 다름없다.
그 당시 내가 겪었던 지독한 절망과 분노는 나 혼자서만 속에다 담아두고 있으면 큰 고질병이 될 것 같았다.
누군가를 붙잡고 내 속을 죄다 털어놓지 않으면 제 명대로 못 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쩌다 문학이란 수단을 붙잡게 되었을 때 얼씨구나 하고 맨 먼저 고백한 것이 바로 군대 시절의 내 신산스런 체험이었다.
다음, 나는 가출을 위해 문학을 한다.
그렇다. 나는 정말로 가출을 도모하기 위해 문학을 시작했고, 또한 문학이란 수단을 통해 여태껏 수많은 가출을 경험해 왔다.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은 나에게 늘 불평 불만과 실망만을 안겨주곤 했다. 가정도, 학교도, 고향 동네도 그랬다.
어릴 적부터 다닌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도 내게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 되지 못했다.
내가 꿈꾸는 이상 세계는 아직까지 내가 밟지 못한 미지의 땅, 걷지 못한 어느 길, 하지 못한 어떤 일 쪽에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예감 때문에 나는 늘 초조하고 뭔가에 늘 갈급했다.
밑빠진 독과도 같은 내 영혼의 빈그릇을 채우기 위해서는 오직 가출만이 내게 허용된 유일한 수단이라고 나는 오래 전부터 믿고 있었다.
내 가출의 역사는 초등학교 시절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어렵게 장만해서 정을 붙이고 살았던 우리 집이 무허가 판잣집이란 이유로 시 당국에 의해 강제 철거를 당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충격으로 말미암아 내 소년 시절의 행복은 순식간에 박살나버렸다.
그날부터 나는 턱없이 조숙해져서 우리 집을 무참히 허물어뜨린 세상과 심각하게 불화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향한 복수를 꿈꾸며 최초의 가출길에 오른 이래 해마다 가출 버릇을 되풀이하다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마음을 잡아 불화의 대상들과 그럭저럭 화해하고 가출벽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처럼 어렵사리 세상과 화해를 이룬 후에도 가출에 대한 질긴 욕구는 끊이지 않았다.
몸은 이미 어른이 되었음에도 마음은 여전히 철부지로 남아 집을 뛰쳐나가 발탄강아지처럼 바깥세상을 제멋대로 싸다니고 싶은 충동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랐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징집 연령 미달인 나이로 공군에 자원 입대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가출의 일환인 셈이었다.
제대 후에 시작된 초등학교 교사 생활도 내 끈질긴 가출 욕구를 잠재우진 못했다.
밤마다 내 방문 앞에 와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내 이름을 불러대는 미지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깜짝 놀라 문을 열어보면 밖엔 아무도 없었다.
나를 바깥세상으로 불러내려고 누군가 자꾸만 꼬드기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는 나날들이었다.
그렇다고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처지에 얼씨구나 하고 그 부르는 소리에 덥석 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 무렵 가출 대신 들이기 시작한 새로운 버릇이 바로 무전여행이었다. 방학이 되기만 기다리느라 한 학기 내내 생병을 앓곤 했다.
마침내 방학이 되자마자 배낭을 메고 무전여행을 떠나곤 했다.
한 달 동안 아무데나 정처없이 헤매고 다니는 무전여행의 재미는 진짜 가출만은 못해도 따분한 교사 생활을 그럭저럭 견디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그러던 중 1966년 서울신문 신년호에 장편소설 현상공모 당선자인 강석근씨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동료 교사가 그 기사를 보여주면서 나더러 문학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문학만이 당신을 끝없는 방황에서 구해줄 거라는 이야기였다. 문학이 좋은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소설 쪽은 가출과 다름없는 형식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벽을 마음대로 뛰어넘을 수 있고 이루지 못한 욕망들을 이룰 수 있는, 이를테면 정신적 가출행위였다.
데뷔한 지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나는 매번 작품을 통해 매번 가출을 도모하곤 한다.
소설이란 수단을 빌려 한 꾀죄죄한 영혼의 가출 전말을 고백함과 동시에 고백 형식을 통해 또 다시 가출 기도를 되풀이함으로써 나는 나를 겁주고 주눅들게 만드는 현실의 갖가지 억압기제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지며 구원을 받곤 한다.

입력시간 2002/04/24 16:38

7. 시인 이성복

詩는 '머리의 언어' 전복시키는 '몸의 언어'
“여배우의 모습 밑에서 수녀를 사랑하다니!…”
19세기 프랑스 작가 네르발의 ‘실비’라는 소설의 이 한 구절은 30년의 내 문학적 삶의 도정을 드러내는 적절한 비유로 쓰여질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내가 문학을 애지중지해 왔던 것은 구두 밑창을 파고든 압정처럼 좀처럼 빠지지 않는 신경증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 제목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끌어와 말하자면, 지난 세월 내 혼곤한 문학적 삶은 ‘야심’이라는 의지와 ‘문학’이라는 표상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대체 난공불락의 그 신경증적 야심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까닭으로 하필 문학이라는 탄두를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뒤에 전해들은 이야기로 조립된 것이겠지만, 어린 시절 내 최초의 기억은 시골 마을에서 이사를 가는데 두어 살 된 아이가 한사코 떼를 써서 소를 몰고 가는 장면이다.
이를테면 그 최초의 나이테 위에 오랜 세월 내 삶은 닮은꼴을 이루며 덧붙여졌고, 출세지상주의적인 한 소년이 열혈 문학청년으로 바뀌었다 해서 그 나이테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 출세 지상주의 소년의 변신
처음 문학에 맛들이기 시작한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별나게 문학이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도 문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학에 대한 나의 신경증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문학 때문에 행복했고 문학 때문에 좌절했다. 마치 심한 몸살을 앓을 때 몸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분간할 수 없듯이, 지금 나는 대체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놈의 문학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문학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니다, 내가 문학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한참 문학에 미쳤던 보다 젊은 시절, 나는 대체 사람이 ‘어떻게 시 없이 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나 다방에서나 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었고, 그리하여 친구들은 하나 둘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 시절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썼던 비유이지만, 지금 나에게 문학은 내 아이를 배고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랑하려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그런 여자와 같다.
문학과의 신접살림은 첫 시집을 내기까지 3년쯤이나 계속되었을까, 그 이후로는 불화와 별거의 연속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까닭이 없지만, 지금에 와서 짐작되는 바로는 언제 어디서나 고개를 들이미는 신경증적인 야심이 애꿎은 문학을 볼모로 하여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내장을 보호하는 갈비뼈가 부러지게 되면 날카로운 뼈끝으로 내장을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듯이, 문학을 신주단지로 모시던 야심이 제 허영을 채우지 못하자 문학을 애물단지로 구박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완벽한 글쓰기’ 운운하며 글쓰기를 미루어 왔던 것도 무시당한 야심의 자기 합리화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자아 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 쪽의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나의 행태가 신경증의 한 양상으로 분류되고 있고, ‘완벽주의’나 ‘미루기’라는 병명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문학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보다 정확히 말해 내 야심이 일으킨 것이고, 지난 세월 나는 내 살을 파먹으면서 이른바 ‘문학신경증’을 앓아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문제의 근원이 드러난 이상, 병과의 싸움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며, 아무래도 이 싸움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 詩는 행복·좌절 동시에 안겨
그렇다면 일단 신경증적 야심을 괄호로 묶고 나서, 문학은 나에게 무엇인가. 동어반복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문학이 없었다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문학은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렌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치 현미경으로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육안으로 안 잡히는 갖가지 미생물들을 발견하게 되듯이, 문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베일에 가리어진 삶의 본모습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흙 속에 묻혀 있는 글자를 읽어내는 어린시절의 놀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문학의 본질이 들여다보는 것, 읽어내는 것, 발견하는 것이라면 꼭 그렇게 해야 할 까닭이 있느냐는 물음이 따를 것이다.
문학신경증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문학을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에게,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원의적(原義的) 의미에서의 ‘콤플렉스’, 즉 표층/심층, 거짓/진실, 추함/고움의 대립구조로 나타날 것이다.
문학을 통해 발견하는 심층, 진실, 고움은 캄캄한 지하실에서 켜 댄 한 개피 성냥불처럼 덧없고 무력하다. 그 불꽃은 우리를 위로해 주거나 해방시켜 주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불꽃이 사라져도 ‘우리가 보았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문제는 문학이라는 불꽃,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시라는 불꽃이 피어나는 곳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라는 것이다. 흔히 테니스 선수는 팔로 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허리로 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팔로 공을 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의식할 때만 몸 전체가 돌면서 나오는 힘이 공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한 피아노를 칠 때 손목에 힘을 주면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힘이 손목에서 딱 끊어지고 손목 힘만으로 치게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머리는 제가 아는 것밖에 모른다. 머리는 상식과 체면의 자리이고 신경증의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공이나 피아노를 칠 때 라켓 헤드와 손가락을 의식하라거나, 돌을 실에 묶어 돌리거나 장도리로 못을 박을 때 돌과 쇠뭉치에 의식이 모인다는 이야기는 문학하는 사람에게도 의미 깊게 들린다.
헤드와 손가락, 돌과 쇠뭉치는 문학에서 바로 언어에 해당한다. 문학은 언어에 기대고, 기댈 뿐만 아니라 투신함으로써 머리의 개입을 막고 몸의 힘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캄캄한 밤 배 위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다 쓰레기통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는 해군수병의 이야기와도 같다.
몸의 언어 혹은 언어의 몸은 엄청난 돌파력으로 머리의 언어가 구축한 삶의 가건물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가령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무릎에 안은 성모 마리아는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떠올리게 하며, 마야라는 이름은 환(幻)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마야(maya)와 다른 것이 아니며, 다시 마야라는 말은 피 흐르는 심장을 주먹으로 움켜쥔 마야 문명의 한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마리아/마야라는 이름을 통해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이는 미술에서의 스크래치라는 기법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 해달 생태서 작가운명 발견
며칠 전 나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에서 바다에 사는 해달의 행태를 보면서, 몸의 언어로써의 글쓰기에 대한 그럴 듯한 은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에 사백 회 가량이나 물질을 하는 어미 해달은, 잠수할 줄 모르는 아기 해달을 물위에 발랑 뒤집어 눕혀 놓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사 분이라 한다.
글쓰는 사람에게 어미 해달과 아기 해달은 한 몸이다. 그는 겉똑똑이 머리를 잠재워 두고 몸 속 깊은 곳을 들락거리며 쉬임없이 연상의 물질을 해대는 것이다.
해달이 먹이로 좋아하는 것은 조개류이다. 해달은 해변에서 주워온 돌을 배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다 조개를 내리쳐 살을 꺼내 먹는데, 해달의 등뼈와 갈비뼈는 그 충격을 견뎌낼 만큼 견고하다. 재미있는 것은 해달이 조개의 빈 껍질을 배 위에 놓고 접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에게 조개 껍질은 언어가 아닐까.
언어는 글쓰는 사람 자신의 몸 위에서 갈라지고 부서지며, 딱딱한 일상의 외피를 벗고 나서야 비로소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속살을 걷어낸 한 언어의 껍질은 다른 언어의 속살을 담는 받침이 되는 것이다.
해달은 바다 밑에 뿌리를 두고 수십 미터 웃자란 해초 다발에 몸을 감고 잔다. 그것은 밤새 높은 파도에 떠밀려 가거나 해변이나 바위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의 언어로 글쓰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 글쓰기가 욕조를 타고 대서양 건너는 일과 같다고 했지만, 언어라는 연약한 물풀에 몸을 감고 밤새 뒤척이며 날 밝기를 기다리는 것.
내가 본 프로에서 어미 해달은 폭풍이 몰아치던 밤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물질도 할 줄 모르는 아기 해달만 남아 떨고 있었다. 글쓰는 사람이여, 당신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는가.

입력시간 2002/05/02 10:33

8. 소설가 한수산

"문학은 통념·일상에서 저항하는 내삶의 양식"
오랜만에 찾은 여주의 효종대왕능에는 봄이 흐드러져 있었다.
작년에도 몇 번을 찾아갔었으나, 그때마다 보수공사 관계로 입장객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새롭게 단장을 끝낸 탓인지, 왕능의 신록은 한결 더 싱그러워 보였다.
이제 쓰려고 하는 작품의 하나에 효종대왕의 이야기가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않고 1649년 즉위한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8년여 중국에 볼모로 잡혀가 치욕을 겪어야 했던 그다. 그리고 돌아와서 북벌계획이라는 웅대한 꿈을 펼치다가 겨우 10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요즈음 나는 몇 개의 공간에 대한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마치 주술에 걸린 듯이.
10여년 전 타이페이에 있는 고궁박물관에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다.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밀리면서 타이완으로 피해올 때 본토에서 가지고 온 보물들이 진열된 박물관이다. 거기에서 극세공의 조각 작품들을 보았던 기억을 나는 충격 속에 간직하고 있다.
손가락만한 작은 상아 조각은 그냥 보아서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뱃놀이 모습을 새긴 것임을 알았다.
새끼손가락 크기의 상아를 깎고 깎아서 배를 만들었는데, 배 위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의 술병과 술잔까지 파놓고 있었다.
허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극한의 허무, 무엇을 위해서라는 전제가 전연 사라진 허무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확대경으로 그 보물, 그 허무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런 조각이 필요했는지.

몇개의 공간에 대한 기억
일관된 집념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에는 어떤 목적도 없었다. 목적성이 없는 허무였다. 왜 무엇을 위해서 그 뼈를 파고 깎고 한 것일까.
조그마한 상아에 대(代)를 물려가면서 배를 새겼던 사람들을 그때 나는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삶의 기술’을 종교라고 한다면, 그들의 삶에서 그런 믿음을 보았다.
나를 위해, 무엇을 위해… 라는 그 단순하고 명확한 명제가 빠져나간 ‘다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삶’이라는 무위의 한 평생이 거기에는 있었다.
나는 내 문학도 그러하기를 얼마나 기도했던가.
전장에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쓰러진 병사의 군화 옆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개미로서는 상상도 안 될 그 거대한 가죽 덩어리. 개미가 그것이 죽어 가는 병사의 발을 감싼 신발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이 쓴 ‘적과 흑’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개미가 병사의 군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듯이, 여름날 하룻밤을 사는 하루살이가 어떻게 계절의 변화를 알 것인가.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그 장렬한 생애를 마치고 떠나는 자리에서, “그토록 기다렸으나 이렇게도 늦게 찾아온 죽음”이라고 자신의 죽음을 노래했다.
딸아이가 고등학생일 때, 한동안 열심히 아이를 데리고 음악회엘 다닌 적이 있었다. 듣고 싶은 곡이 아니라 연주가를 찾아다닌 음악회였다.
그때 딸아이와 함께 들었던 연주회에는 아이작 스턴이 있었고, 로스트로포비치가 있었고, 중년의 온화함으로 성숙한 안네 소피 무터가 있었다.
어린 딸이 아비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아이에게 노인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이제 자신의 삶을 경영해 갈 그 아이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동기를 마련해 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음악에 몸 바친 노대가의 모습을 알게 함으로써, 아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아이가 눈뜨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가르침이 어디에 있을 수 있으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시베리아서 비우는 삶 배워
97년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까지 열흘을 달린 적이 있었다.
기차에서 자고, 기차에서 먹고, 기차에서 흔들려야 했던 그 여행이 끝났을 때는 며칠을 땅이 기우뚱거리는 것 같았다. 문명에서 원시로, 도시에서 황무지로 가는 기나긴 여로였다.
하루 종일 달려도 창 밖의 풍경이 변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륙이라는 그 넓이를 실감하기보다 먼저 두려움에 가까운 대지의 장엄함이 거기에는 있었다.
금빛으로 물든 자작나무가 하루 종일 차창 밖을 지나가기도 했다. 어두운 잿빛으로 뒤덮인 구릉지대가 참혹한 모습으로 차창을 메운 채 한나절을 지나가기도 했다.
그 공간과의 만남은 나에게 소리 없이 말해 주었었다. 더 무엇을 찾아 헤매고 더 무엇을 가지려 하지 말라고.
그렇게 나를 비우도록 한 공간이 있는가 하면 나를 채우게 했던 공간도 있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가 그랬다.
비 내리는 거리를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헤매던 바르셀로나의 하루. 행복에 겨워서 우산을 받지 않고 빗속을 걸었었다. 이제 돌아가면 더 치열하게 살리라. 내 몸의 비늘 하나하나를 떼어내듯 그렇게 시간을 아끼리라 생각했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을, 이렇게 한적하고 고요하고 우아한 거리를 거닐 수도 있는 것을.
그러나 서울로 돌아온 나는 아무 것도 변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이 닦고, 머리 감고, 전화를 걸고, 약속을 하며… 철 지난 낡은 양복처럼 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못했다. 시베리아 벌판에는, 그 마른 초원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우뚝 서서 내가 탄 열차를 바라보던 사내가 있었다.
벌판에는 오직 그 남자 하나였다. 저 드넓은 초원에서 경영하는 그의 삶, 그것은 얼마나 찬란하던가. 느릿느릿 그의 생애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던가.
그 변하지 못하는 나에게, 불에 타들어 가듯 묻는다.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무엇으로 느끼는가. 끊임없는 교통체증에 화를 내면서, 저녁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계단을 뛰어오르면서, 작은 자존심 하나를 지키기 위해 무참하게 구겨버린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채 늘 부대끼며 살아가는 경쟁심, 그런 속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는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들 때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요즈음은 기도하고 있다.
좀 더 작은 것에서 눈부신 발견을 하면서 가자고. 그렇게 느리게 가자고. 여유와 진정함, 내 삶을 꾸며 줄 그 두 날개를, 주여, 잃지 않게 하소서.
요즈음에 와서야 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아야 코스모스 꽃잎이 흔들림을 볼 수 있듯이, 개미는 쪼그리고 앉아야 보인다.
달려가는 사람에게 땅 위를 기어가고 있는 저 작은 개미가 보일 까닭이 없다. 개미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나는 얼마나 모르고 살았는가. 여유도 진정함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개미를 바라볼수 있는 지혜
조금 천천히, 조금 느리게, 그렇게 해서 찾아지는 여유로 좀 더 단순해지자. 내 삶에서 진실로 빛나는 것이,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것이 보이지 않는가.
달리고 달리면서 개미 따위가 아니라 사자와 코끼리같이 크고 엄청난 것만을 찾아왔다면 그 한평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지나쳐 버리게 하는지를 왜 나는 이제야 깨닫는 것일까.
문학은 내 삶의 한 양식이었다.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의례(儀禮)였다. 이제 남아 있는 시간에 기대어 그렇게 담담히 가야할 길을 바라본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일그러진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아직도 나에게는 남아 있다.
그것이 복원이라면 남한산성에서 효종대왕능까지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역사에 대한 증언이 될 것이다.
분단 조국에서 태어나 살아오면서 한 지식인으로서 한 치도 비켜설 수 없었던 척(斥)과 화(和)의 문제 그리고 조국이란 무엇이었나를 거기에서 묻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작업으로 역사에 대한 탐구가 남는다. 천주교 박해사를 통해 고결한 영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려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란 무엇인가에 가 닿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입력시간 2002/05/08 16:59

9. 시인 김용택


山처럼 江처럼 산 세월…문득 詩가 내게로 왔다
해가 지고 있다. 학교 뒷산 너머로 5월의 맑은 해가 진다. 해가 지면 산이 그늘을 내린다. 산그늘은 내리면서 5월의 푸른 산을 덮고, 산과 밭에 있는 감나무를 산그늘에 세워두고 학교 교실 뒤로 내려와서 교실을 덮고 운동장을 지나간다.
아이들이 산그늘에 쫓겨 집으로 간다. 학교를 다 덮은 산그늘은 강변에 핀 붉은 자운영꽃을 되살려 놓고 강을 건너 마을을 지나 산을, 앞산을 넘어 가버린다.
오! 이제 세상은 산그늘이 만들어낸 푸른 어둠으로 잔뜩 긴장된다. 풀잎과 풀잎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산과 산 사이를 나는 지나간다.
그 푸른 어둠의 긴장을 뚫고, 그 푸른 어둠을 가르며 나는 간다. 그랬다. 내 문학은 해 저문 저 배고픈 푸른 들길에서 시작되었다. 푸른 어둠에서 캄캄한 어둠으로 건너가는 저 숨막히는 자연의 긴장 속에 나는, 내 문학은 있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나는 한 산골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있었다. 태어나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일이 내게 벌어진 것이다. 이 느닷없는 삶의 전환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싱그러운 스물한 살의 팽팽한 젊음은 그러나 산골 아이들 앞에서 너무나 심심했다. 까만 머리통의 아이들과 작은 들과 산은 내게 무료했고, 너무나 적막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길
그렇게 몇 개월을 심심하게 보내고 있는데, 그 먼 산골까지 책을 월부로 파는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나는 낮에는 동무들과 산에 나무 가고, 밤에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매달려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 해는 눈도 많이 왔다. 세상 가득 눈이 온 날 아침 나는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징검다리 위의 눈을 밟으며 강을 건너갔다 왔다.
겨울방학이 그렇게 끝나자 나는 전집 여섯 권을 거의 다 읽고 있었다. 학교로 가기 위해 차를 타러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그러나 내게 전혀 새로운 길이었다. 산과 들과 나무와 길과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내 걸음걸이가 방학 전의 것들이 아니었다. 뒷산에 있는 느티나무가 그렇게 큰 줄 나는 그때야 알았다.
앞산 산등성이를 비껴오는 아침 햇살은 눈부셨고, 산굽이를 돌아가는 아침 강물 소리는 새로웠다. 세상은 내게 그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신비롭던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눈부시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목월 전집’ ‘이어령 전집’ ‘니체 전집’ 그리고 한국문학 50권짜리 전집도 그때 읽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전혀 낯선, 그러나 그 어디에선가 보았던 것 같은 그 샛길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났다. 나는 날마다 나를 응시하고, 나를 신기해 했다. 늘 버리고, 무엇인가 설레는 그 무엇을 새로 얻었다.
그리고 나는 평생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다. 그분들의 아침과 그분들의 일과 놀이를 나는 보았다. 한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 그 동네에서 살다 죽어 그 동네 산에 묻히는 농부들의 삶은 내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을과 내가 사는 이 나라와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늘 새날이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고, 그런 생각들이 쌓였다. 늘 죽고 늘 태어났다. 사사로운 나의 가치들이 폐기되고 아름다운 공통의 가치가 내 속에 찾아와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5, 6년 지난 어느날 아침 나는 마루에서 뚤방으로 내려섰다. 뚤방 시멘트 바닥에 무엇이 떨어졌다. 코피였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던 달짝지근한 것, 그것, 그랬다. 내 것이 나의 목마름을 적셔주었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방에 누워 멀거니 여기저기 쌓인 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그렇구나. 저 책을 사람들이 쓴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나도 글을 써 보아야지. 그리고 나는 글을 써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나는 외로웠다. 내겐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스승도 문학을 이야기할 그 누구도 내겐 없었다. 오직 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면서 나를 키워갔다. 그렇게 13년이 흘러갔다. 그 길고 긴 세월, 내가 제일 못견뎌한 것은 저 봄날의 저묾이었다. 산그늘에 덮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 팽팽한 긴장 때문에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 긴장을 뚫고 나는 나무 사이를 지나다녔다. 어둠이 내려오는 뒷산을 오르며, 흰 산꽃들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또 못견뎌했던 것은 창호지 문에 새어든 달빛이었다. 달이 뜬 봄밤이면 나는 툇마루에 나가 달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달빛이 수시로 나를 불러내면 나는 징검다리 돌들을 세며 강물을 건너갔다. 달빛에 빛나는 검은 바위들과 밤이슬에 반짝이는 풀잎들. 달은 나를 두고 그렇게 갔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
그 긴장된 푸른 어둠 속 풀꽃들의 서늘한 아름다움을 견딜 수 있고, 빈 방을 찾아온 달빛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힘이 들었다. 절망은 예고도 없이 수시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어두운 저 절망의 나락 속에서 한 줄기 불빛을 살려내곤 했는데, 그것이 시였다.
어두운 땅 속에 묻힌 무가 빛을 찾아 노란 싹을 키우듯이 나도 그렇게 시의 빛을 찾아 어둠 속에서 내 생명의 싹을 길렀다. 해가 저물면 나는 강변을 헤매거나, 들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밤이 되면 일어서는 막막한 산. 산을 감고 돌아가는, 달빛 받은 강물.
그렇게 내가 산과 강에 내 몸을 모두 기대고 살기를 13년, 어느날 시가 내게로 왔다. 어두운 산에서였는지 아니면 흐르는 강물 그 어느 굽이에서였는지, 내게로 시가 왔던 것이다. 내 몸이 환해지는 시, 암울한 내 청춘의 어둠 속을 뚫고 달려왔던 한 줄기 불빛 같은 시, 세상을 알아낸 것 같은 시, 시가 내게로 왔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서른 다섯 살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왜 문학을 하는가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다만 살 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섬진강 가 이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에 태어나 나는 이 곳의 모든 자연들과 갈등하고 화해하며 살았다. 나무가 나무로 보이고, 산이 산으로 보이고, 소쩍새 소리가 소쩍새 소리로 들리기까지 내가 겪은 수많은 날들이 나를 시인이게 했다.
시인? 글쎄, 내가 시인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시가 이 세상 그 어디에, 그 무엇에,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다만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땅을 노래해 왔다.
세상에 태어나 사람이 바람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나는 바람결에 스치는 풀잎일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인생, 그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가. 도대체 우리들 삶이 그 무엇을 이룬단 말인가.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은 지금 행복한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언제나 새로운 자연
나는 사랑한다. 나를, 그리고 내가 태어나 걸었던 강길과 그 길에서 만난 풀과 나무와 봄과 여름의 풀꽃들과 비오는 산과 눈이 내리는 강물과 몸을 다 눕히는 봄 풀잎들, 새로 잎 피는 나무와 노을이 져버린 겨울 강가에 떠 있는 하얀 억새들, 멀리 날아가는 새와 그 속에 허리 굽혀 땅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들을 나는 노래해 왔다.
그리고 그 길 끝에 내 생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주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거기, 지금도 있는 거기가 늘 빛나는 내 현실이 되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되었다.
나는 복을 타고난 사람이다. 늘 보던 산과 물이지만 늘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자연과 그리도 하얀 운동장에 나뭇잎 같은 아이들, 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시가 있었다. 내 몸을 빛내주는 시, 내 암울한 청춘을 훤하게 뚫고 지나온 그 빛나는 시, 누구도 못 말리는 사랑과 자유, 그리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이 정신의 풍요로움.
나는 지금도 내 의지와 열정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 로댕의 말이다.
문학을 왜 하는가? 살아야지. 죽어도 괜찮다는 하루를 나는 그냥 살 뿐이다. 문학은 최고의 삶을 사는 일이다.

입력시간 2002/05/15 16:50

10. 소설가 황석영

"말라버려선 안될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글쎄, 나는 왜 '문학 따위'를 아직도 붙들고 있는지… 이 질문은 아직도 내게 신선하고 유효한가를 나는 오늘 밤 새삼 되묻고 있다.
지난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은 이래로 나의 문필 생활은 올해로 어언 40년이 되었고 이제 곧 환갑인 나이에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는 전후의 어려운 시절임에도 내게 책을 사다 주셨고 나에게 일기를 쓰도록 권하셨다. 영등포의 야시장 골목에 나가면 난리 중에 생계가 어려워진 집이나 빈 집에서 쏟아져 나온 개인 서가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헌 책을 팔기도 했지만 대개는 노천에 책꽂이를 늘어놓고 대서점을 하는 데가 많았다. 나는 누나들과 함께 책꽂이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날마다 닥치는대로 책을 빌려다 보곤 했다.
해방 공간에 나온 갖가지의 세계명작 번역서로부터 대중소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몇 개의 책꽂이를 모두 훑었다.
다락과 마루방에 엎드려서 읽다가 유리창 너머로 변하고 사라지는 풍경들을 눈에 익혔다. 여의도 비행장의 프로펠러 소리며, 공장의 회색 담벽이며, 샛강의 푸른 들판이며, 그 속에 피어나던 꽃다지, 자운영과, 까마중과, 뱀딸기가 책 속의 다른 세상들과 어우러졌다.
글짓기 행사에서 몇 차례 상을 받고 나서, 칭찬을 받은 어린 것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담에 크면 뭐가 될거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작가가 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곤 했다.
당시에는 작가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글 쓰는 일이 학과 공부에 비해서는 그다지 대수로운 짓이 아니라는 점은 학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확실하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내 눈과 가슴에 그 어떤 기관이 생겨나 있었던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건 ‘인문적’이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아무튼 ‘사람 살이’에 대한 따스한 온기와 물기 같은 것이 스며든 무슨 투명한 렌즈 같은 것이었다.
빛을 투과해서 여러 색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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