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나 한 수

풍경소리

취한배 2004. 7. 19. 15:13
베틀일 서툴어서 겨우 실오리 하나밖에 건지지 못한다 해도, 이만큼의 세월이면 열 백 번을 빨아도 끄떡없는 질긴 옷 한 벌은 갖추었을 터입니다. 보이지 않을 뿐 그러나 육신(肉身)의 옷은 솔기마다 커다란 창이 나있어서, 아무리 많이 담아도 온종일 떠돌다보면 어디다 흘려버렸는지 주머니가 텅 비어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네 언제나 지닌 것 하나 없이 빈손인 까닭입니다.

 형편이 딱하면 마음까지 가난해지기 십상입니다. 아는 이를 만날까 휘황한 거리를 피해서 골목길을 더듬고, 대접할 것이 마땅찮으니 한낮에도 대문을 걸어두게 됩니다. 시간이 저만큼 남아있는데도 놓치지나 않을까 댓바람으로 서둘고, 길을 정하고 나섰으면서도 세거리를 만나면 어찌해야 할지 또다시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서정주,「무등(無等)을 보며」에서)
 
 끝내 이루지 못한다 해도 시들지 않는 푸른 꿈 하나 간직하고 있으면 마음 더없이 부유해집니다. 끝끝내 만날 수 없다 해도 뚜렷한 형상(形象) 하나 마음에 품고 있으면 한결 여유가 생깁니다. 내일은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있어, 빈방에 달빛만 가득 들여놓고도 부듯하여서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神)이거나 그리운 사람이거나 다음 버스에는 아름다운 그(녀)가 타고 있을 것이기에 두어 대쯤 차를 놓치고도 더 이상 동동거리지 않게 됩니다.
 
 어떤 꿈을 지녀 계시는지요, 그대는 오늘 누구의 마음을 베고 누우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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