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나 한 수

회상

취한배 2004. 6. 28. 00:17

사람들은 믿지 않지만
세상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어디쯤에 골목이 하나 있다 술에 취하거나 발을 헛딛을 때마다 여지없이 빠져드는 그 골목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섰을 때 골목 초입을 지키던 아이들 찍찍 침을 뱉으며 적의에 찬 시선을 던져왔다
걸음을 옮길수록 골목의 끝은 보이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나를 빨아들였다, 흡사 거대한 진공터널 같은 골목
밤과 낮이 따로 없는 그 골목, 사람들은 죄다 유령 같았다 바람 불면 신문지처럼 펄럭이며 날아갈 것 같은 그들, 누군가 전봇대 아래에서 소리없이 울었고
누군가는 술병을 들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고
누군가 쓰레기통 위에서 바이올린을 켰고
누군가 편지를 읽으며 지나갔고 누군가 전단을 뿌렸고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고, 왜 그림자가 없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림자가 없다, 그럼 내가 유령이란 말인가
도망칠수록 발목이 깊숙이 빠져드는 거미줄 같은 골목 그곳에서 나의 감각기관은 벌레처럼 민감해진다
안 들리던 저주와 분노의 소리, 안 보이던 쾌감과 환희의 빛깔 등 언저리에서 촉수가 자라고 어둠 속에서 나는 눈뜬다 갑자기 생이 뜨거워지고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의 그림자인 그 골목, 내가 자주 다니던 신촌과 광화문 도처에서 이따금씩 나를 나꿔채는

 

 

 

어찌합니까?

나, 젊은 날 못내 잊을 수 없으니

'술이나 한 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젖섬  (0) 2004.07.02
검정고무신  (0) 2004.07.01
꿈결에라도  (0) 2004.06.21
빗물소리  (0) 2004.06.19
멈춰버린  (0) 2004.06.18